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분류없음 2009/06/29 23:31 ||
소설가 김연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
황지우 시인의 시는 암시적이고 모던하고 때로 서정적이기 때문에 현실참여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대학교 초년생일 때, 그가 쓴 작은 판형의 산문집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거기에는 '시적인 것'에 대한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어요. 그가 말하는 '시적인 것'이란 다다이스트들이 하는 꼴라쥬와도 비슷해요. 예컨대 신문 기사를 그냥 통째로 옮겨놓아도 '시적인 것'이 되기도 하죠. 검열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신문기사나 앵커의 논평 자체에 검열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단순히 옮겨놓는 것만으로도 '시적인 것'이 된다는 뜻이죠. 어제 제가 위의 시를 그냥 블로그의 게시하는 것만으로도 황지우적인 관점에서는 '시적인 것'이 됩니다. 이런 것에서 짐작하시겠지만, 황지우가 말하는 '시적인 것'이란 매우 정치적인 행위에요. 황지우 시가 단순히 문학적이지 않고, 긴장을 내포한 까닭은 이 때문이에요. 그가 문학에 대해서 말하면 말할수록 그의 행위는 정치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죠.
황지우 시인에게 본명이 따로 있다는 건 이십 대 시절 우리에겐 널리 알려져 있었죠. 서울대 문리대의 황지우, 이인성, 이성복 이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문청 시절에 우린 즐겼어요. 황지우라는 이름은 그가 들고 다니던 타자기의 한 활자가 고장나는 바람에 만들어진 필명이라는 소문을 우린 들었죠. 매우 낭만적인 소문이지만, 아마도 사실은 아닐 거예요. 그 시절에 황지우 시인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동생인 황광우 씨가 쓴 책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를 읽으면 알 수 있어요. 그 책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황지우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 그와 그의 가족이 당한 고통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나는 아주 나중에야 황광우 씨의 책을 읽고 나서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황지우 시인의 시를 다시 보게 됐어요. 제가 그런 고통을 당했다면 저는 절대로 '시적인 것' 따위를 말하진 않았을 거예요. 저는 미학을 버렸을 거예요. 저는 좀 생각이 짧거든요.
위의 시는 1980년대 초반에 황지우 시인이 쓴 시에요. 전두환 씨가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하던 시절이에요. 그 때 극장에 가면 애국가를 틀어줬어요. 하절기에는 오후 여섯 시, 동절기에는 오후 다섯 시면 어김없이 거리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던 시절이었죠.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우린 길을 걷다가도 걸음을 멈추고 시청 쪽을 향해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야만 했지요. 그러니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애국가가 나오면 다 일어나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놓아야만 해요. 갈 곳이 없던 시절이니 연인과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려고 들어갔다고 해도 그 애인의 손을 만지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짐해야만 했어요. 애국가가 나오는 동안 스크린에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발전하는 모습이 비춰졌어요. 포항제철의 용광로, 서울의 화려한 빌딩, 뭐 그런 것들이죠. 산업역군들의 활약 같은 거. 마지막은 위의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을숙도의 철새들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풍경이었어요. 1980년대 초반에는 그냥 그런 게 시적인 거예요. 지금 우리가 롯데시네마의 비상구 안내도를 그대로 문자화한다고 해도 시적인 것은 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 때는 그랬어요.
그 무렵, 지금
여러 가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몇 가지만 얘기할께요. 정권이 바뀌고 그간 여러 사람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글을 썼지요. 동아일보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운동권 학맥'이라는 칼럼도 실렸습니다. 뭐, 제목과 같은 내용의 글이에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는 운동권 출신의 교수들이 있다는 이야기에요.(이 글에 대한 반론은 며칠 뒤 같은 신문에 실린 '한예종에 대한 진실과 거짓말'입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예술가라면 1980년대에 정치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인 것이 내면화돼 있는 게 당연하죠. 그렇지 않고 무슨 예술을 해요? 1980년대에도 청와대를 칭송한 문인들이 있었어요. 그건 두고두고 그들에게 오욕이 되는 일이잖아요. 아무튼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쨌든 지금 상황은 운동권 출신이니까
황지우 시인이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또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살아온 삶을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은 부당하지요. 하지만 삶이라는 게 언제나 논리적으로, 정의롭게 흐르는 것은 아니니까 부당하다고 해도 모든 일이 순리대로 풀리는 건 아니지요. 대신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건 기억해야만 하겠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